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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의 유언

Author
somangsociety
Date
2016-03-15 10:23
Views
930

어느 시인의 유언

입력일자: 2009-12-05 (토) 한국일보

몇해 전 이곳 LA에서도 방영됐던 MBC-TV의 ‘하얀 거탑’은 주인공 장준혁(김명민 분)이 대학병원 외과과장에 오르기까지의 치열한 삶을 그린 인기 드라마였다. 야망을 이루기 위해 그는 친구를 짓밟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장준혁에 분노를 느끼지만 끝에 가면 ‘꼭 닮고 싶은 참 나쁜 사람’이란 생각이 들게 된다.

마지막 장면이 드라마틱하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유언장을 쓴다. 사체를 기증할 테니 자신의 몸을 해부해서 의학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란다는 내용이다. 출세를 위해 온갖 비열한 짓을 다 하면서 도전과 열정의 끈을 놓지 않았던 주인공. 그러나 죽음의 병상에 눕게 되자 ‘웰 다잉’(well-dying)을 선택한다. ‘하얀 거탑’은 그래서 잊혀 지지 않는다.

요즘 한인노인들 중에도 사체를 기증하겠다는 분들이 가끔 있다. 화장도 자식들에게 부담이 되니 아예 대학병원에 자신의 사체를 기증하면 그런 번거로움이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상담을 할 때면 "죽는 것이 이렇게 힘들어서야"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개중엔 ‘하얀 거탑’의 주인공처럼 정말 의학발전과 이웃을 위해 장기와 사체를 기증하겠다는 분도 있다.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한 후 자신을 내어놓는 고귀한 결단을 한 것이다. 한 사람이 사체를 기증하면 최소한 70명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 그런 유언을 남기시겠다는 분께는 머리가 절로 숙여진다.

인간사회에서 최대 불가사의는 모든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은 죽을 것이란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아무리 현대사회의 최대 관심사가 ‘웰빙’이라고는 하지만 잘 살아야 잘 죽고, 또 잘 죽어야 잘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삶의 마지막 꼭짓점이라는 죽음.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수도 있고, 환경을 위해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라는 유언을 남길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답고 축복받을 죽음은 사체기증이 아닐까 싶다.

유언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남기는 말이기도 하지만 미리 해두는 유언은 남은 생의 이정표가 되어주기도 한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노엘 테스트(1926~1994)는 자신의 유언을 한 편의 시로 남겨 후세에 감동을 줬다. ‘나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To Remember Me)`이다.

“언젠가는 주치의가 나의 뇌 기능이 정지했다고 판정을 내릴 때가 올 것입니다./ 내가 아직 살아있을 때, 나의 목적과 의욕이 정지했다고 선언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나의 침상을 죽은 자의 것으로 만들지 말고 산 자의 것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나의 몸을 살아있는 형제들을 돕기 위한 생명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나의 눈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얼굴과 여인의 눈동자 안에 감추어진 사랑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십시오./ 나의 신장은 한주일 한주일 혈액 투석기에 매달려 삶을 영위하는 형제에게 주십시오./ 만약, 무엇인가를 묻어야 한다면 나의 실수들을, 나의 약점들을, 형제들에 대한 나의 편견들을 묻어주십시오./ 내가 부탁했던 이 모든 것들을 지켜 준다면 나는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냥 죽을 것인가, 아니면 시인처럼 영원히 살 것인가. 가장 고귀한 죽음은 생명을 나누는 죽음일 것이다.

유분자 /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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