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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이민과 간호사들 - 한국일보

Author
somangsociety
Date
2016-03-15 11:16
Views
2632

한인이민과 간호사들

지난달 말 LA에서 열린 재외한인간호사회 창립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흑백사진 한 장을 인터넷에서 찾아냈다. 하와이 호놀룰루의 한 병원 앞에서 두 명의 앳된 한인 간호사가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이다. 사진 설명이 없어 누구인지는 모른다. 사진을 찍은 시기도 1920년 대쯤으로 추정될 뿐이다.
이 여성들이 조선에서 이주해 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1903년 이민선을 타고 온 하와이의 사탕수수밭 노동자들이 이른바 ‘사진 부부’와 결혼해 낳은 딸로 보인다.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간호사가 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마 언어소통의 장애가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진료를 위해 병원 측이 단기훈련을 거쳐 간호사로 취업시킨 게 아닌가 싶다.
마치 잃었던 혈육을 되찾은 것 같은 기쁨이 들기도 했으나 당시 보잘 것 없었던 조선의 자화상을 고물 영사기를 틀어 보는 것 같아 일말의 서글픔도 있었다.
간호사들의 미주 취업은 1960년대 초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주도한 이민법 개혁으로 길이 트였다. 그 때만해도 미국 이민법은 유럽 우선이어서 한국인은 전쟁고아의 입양이나 결혼 말고는 영주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케네디는 이민법을 ‘비미국적’이라며 혁파할 뜻을 분명히 했다. 이민개혁법은 그러나 케네디가 암살 당하는 바람에 그를 승계한 린든 B. 존슨이 서명 발효됐다. 아시아인의 이민허용과 직계가족 초청, 간호사를 포함한 전문 인력의 취업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필자도 따지고 보면 케네디의 수혜자다. 미8군 KSC 병원에서 간호과장으로 오래 일해 영어엔 큰 어려움이 없다고 자부했지만 막상 미국에 와보니 모든 게 생소했다. 당시 간호사들 사이에 전설처럼 회자됐던 것이 ‘7-Up’ 해프닝이다. 환자에 세븐업을 주라는 의사의 처방을 잘못 이해해 침상에 누워있는 환자를 7번이나 일으켜 세웠으니 지금 생각하면 아찔했던 순간들이었다.
간호사의 미국 진출은 서독 파견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뤄졌다. 미국은 새 이민법이 확정된 1965년, 서독은 이듬해 1진이 도착해 간호사들이 해외에 첫발을 내딛게 됐다.
최근 연방법원 판사로 취임한 존 리(이지훈) 판사의 어머니 이(최)화자씨는 서독 파견 간호사(혜천간호대학) 1진에 속한다. 3년의 계약기간이 끝나자 시카고로 이주해 병원에서 일하며 아들을 연방판사로 키워냈다.
사실 미주한인 이민사에는 간호사가 크게 한 몫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인 이민 10명 중 1명은 간호사와 직간접으로 연결돼 있다. 먼저 와서 자리를 잡은 후 가족을 초청하고, 배우자가 또 그쪽 가족을 불러들여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한인간호사의 해외진출 50주년을 맞아 한국 대한간호협회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이번에 재외한인간호사회가 발족됐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간호기술을 습득할 수 있어 그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은 결과물이다. 1.5세들이 참여하고, 모니카 권 LA 카운티 간호국장 등 주류사회에서 고위공직자로 활동하고 있는 간호사들이 많이 참여해 더욱 기대를 높여주고 있다.
1세대 이민 간호사들도 언젠가는 하와이의 빛바랜 사진처럼 역사에 묻히게 된다. 그러나 당시와 다른 점은 땀과 눈물로 일군 우리의 유산을 후대에 자랑스럽게 물려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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