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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만남.. 헤어짐을 다 사랑해야…

 

김현자 선생님

1951년에 미국유학을 하고, 50년간 한국 YWCA에서의 활동, 국회의원, 여성정치연맹 총재를 지낸 여장부로 보이지 않는다. 댁의 거실을 가득 채운 가족사진, 미대 다니는 손자의 그림 때문이리라. 차와 과일을 미리 준비해놓고 기다리는 모습도 전세계를 다니며 활동하던 여성운동가를 떠올리기 어렵다. 그런데 막상 입을 여는 순간 여성계의 거목 앞에 서있음을 느낀다. 단정하고 기품있는 말속에 빠져들며…

-왜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꺼릴까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죠. 육체가 무로 돌아가고, 사랑하는 가족, 친지와 단절된다는 공포가 큰 거죠. 서양에서도 죽음을 터부시하고 두려워하는 건 마찬가지예요. 예전에는 대가족으로 살면서 자연스레 조부모, 부모의 죽음을 접하면서 생로 병사의 이치를 알아갔는데.

노인복지관 입학생… 익명으로 다니고 있어요

– 요즘에는 노년에 대한 두려움도 크던데요?
“고령사회로 넘어가면서 끝까지 아프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병들거나 잘못된 삶을 사는 경우도 많아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많아요. 나부터도 80을 넘었는데, 옛날에는‘70이면 죽겠지’했어요. 좋은 약도 개발되고 나니 웬만하면 장수하게 되어 있어요. ‘어떻게 노년을 준비할 것인가’가 개인이나 국가적으로 부담이 되는 세상이 됐어요. 우리또래는 90%이상 노년에 대한 대비를 한 사람이 없다고 봐요. 달랑 노인 둘이 살거나, 혼자 사는 경우 등.

죽음교육과 노후대비 교육은 둘이 아니에요. 몇 년 전부터 노인복지관에 가고 있어요. 거기서 운동도 하고 중국어도 배워요. 노인학교 입학생이 됐죠. 신기한 건 그곳에 오는 할머니들은 건강하고 활기가 넘쳐요. 교육열도 대단하고요. 다만 서로에 대한 관심은 나이와 건강뿐이죠. ‘이름, 과거경력, 학력 아무것도 묻지마’죠. 나도 철저히 익명으로 다니고 있어요. 왕따 당하지 않으려고… 서럽게 살아온 할머니들이 많은데 난 가진 게 너무 많아요.
노년의 삶의 질을 높이고 두려움을 이기려면 머리를 쓰고 몸을 움직여야 되요. 다행히 노인복지관이 곳곳에 많이 생기고 있어요. 그래야만 질병치료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줄일 수 있죠.”

– 죽음 준비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있나요?

“김옥라 이사장이 남편 라익진 회장이 갑자기 돌아가자 1년간을 두문불출하고 사시대요. 그때 슬픔에서 영 빠져나오지 못 하려나 했어요. 아주 심각했죠. 그런데 놀랍게도 비통함속에서 건져 올린 건 죽음준비교육이었어요. 그때부터 16년이 지나면서 우리는 죽음준비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하게 되죠. 김이사장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죽음준비와 슬픔치유의 전도사가 되고, 나도 그 영향을 받았어요. 열심히 사는 것이 죽음준비라고 생각해요.

미치 앨봄이 쓴‘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미치 앨봄이 죽음을 앞둔 노교수를 화요일마다 찾아가 인생에 대한 강의를 듣는데 그 중에서, 어떻게 죽는가를 알면 어떻게 사는가도 알 수 있다.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를 해야 한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인가, 내가 갈 준비가 되어 있나. 내가 할 일들을 다 했나를 물어야 한다. 내가 죽는다는 것을 알면 지금의 인간관계, 내가 숨쉬고 있는 이 우주공간, 따사로운 햇살과 살랑거리는 바람이 정말 소중하게 느껴질 것이다.

정말 이런 심정으로 살아야죠. 지난 세월 교육의 기회를 누렸고, 봉사의 기회가 주어졌고 받은 게 너무 많아요. 내가 하겠다고 나선 것보다, 뜻하지 않게 주어진 게 많아요, 하지만 일단 하면 최선을 다했죠.”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후 미국컬럼비아대학원을 마치고 돌아와서 평생 YWCA와 동고동락했다. Y를 떼고선 그의 삶을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또 한국여성전문직클럽을 창립하여 발전시켰다. 2선의 국회의원 경력은 여성입법에 무게를 두는 정치가로서 가족법철폐, 남녀고용평등법, 남녀차별 철폐법으로 여성권익의 신장을 위해 활동했다. 젊은 시절엔 애기를 낳고 힘들어서 집에 들어앉으려고 하면 누군가 자꾸 끌어냈다고 했다. 하지만 누구라도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과 국제경험이 풍부한 그를 가만히 나두지 않았을 게다.
“남들이 갖지 못한 기회를 누린데 대한 보답을 해야 되요. 지금도 감사한 일의 연속이예요. 3남매가 잘 자랐고, 손자들이 제 몫을 잘하고 있어요.”

헤어지는데도 연습이 필요해요

– 10년 전에 에세이‘아름다운 만남’을 내고 인연을 가진 사람을 일일이 거론하며 감사함을 썼는데 그렇다면 아름다운 헤어짐은 어떤 걸까요?

“마음도 약하고, 걱정도 많은 편인데다 비사교적이고 인간관계에도 소극적인데 이만큼 살아온 건 무수히 많은 만남 때문이죠. 아름다운 만남으로 삶이 풍요로웠어요.
주변의 가까운 분들이 한사람씩 사라지고, 병들고 힘들어하는 걸 보면 쓸쓸한 마음이 들어요. 생로병사는 엄연한 현실이니까 시간이 다 되기 전에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 사랑해야지요. 차디찬 베란다에서 겨울을 이겨내는 화분들까지도 내가 사랑을 나눠줘야 되고요. 그러다 마지막에‘고맙다 사랑한다’할 수 있다면 아름다운 헤어짐이 아닐까요?

헤어지는데도 연습이 필요해요. 자연스럽게 헤어져야지 중환자실에서 무리하게 생명을 연장시키거나, 심폐소생술을 하는 건 바라지 않아요.”

– 누구나 죽지만 좋은 죽음을 맞이하는 건 쉽지 않은데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안겨주듯, 잘 보낸 삶은 행복한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했어요. 생전에 어떻게 살았고, 특히 어떤 노년기를 보냈는가가 행복한 죽음의 열쇠죠. 작년에 돌아가신 강원용 목사님은 쉬고 싶어 입원했다가 며칠 뒤 조용히 숨을 거두셨죠. 일생을 걸고 열심히 살다가 아름다운 마무리를 했으니 복을 다 이룬 거죠. 죽음이 삶의 연장선에 있으니 좋은 죽음이 좋은 삶에서 나오는 건 당연해요.

매일 아침 남편과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감사와 회개의 기도를 해요. 열렬한 기도 생활을 한 신자는 아니지만, 감사기도를 한 가지 덧붙이면,
주님, 이렇게 나이가 들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지난 세월에 대해 감사하고 남은 날들을 보다 깊게 음미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늙어가는 모습도 담담하게 받아들여요. 남편의 기도는 언제나 힘이 있고 간절해서 감동을 받아요. 우리가 가기 전에 할 일은 감사와 사랑하는 일만이 남았어요.”

오기형 교수(전 연세대 명예교수)와 55년을 해로하며 기도와 신뢰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노부부의 편안한 모습이 떠오른다.

– 요즘은 유서쓰기도 거부감이 적어졌어요.

“작년에 에세이‘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를 냈어요. 책을 쓰면서 유서를 다 쓴 셈이에요. 내 자취를 남겼으니까요. 누구든지 꼭 책을 내지는 못해도 일기 형식으로라도 기록을 남기는 게 좋아요. 특히 병에 걸릴 때 치료과정이나 병력기록은 그 사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돼요. 쓰는 게 어려우면 녹음이라도.

내 유서는 감사의 유서예요. 나를 키워준 부모님, 가족, 모교, 직장, 단체에서 만난 친지와 선후배, 무엇보다도 생명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로 마무리하고 싶어요.”

<삶, 사랑, 죽음> 2008년 3,4월호 대담 특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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