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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다르게 죽는다… 수잔정 박사

 

작년 11월 월스트리트저널에 ‘의사는 다르게 죽는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내가 임상교수로 일해 온 USC에서 가정 의학 의사로 일하다 은퇴한 닥터 머레이가 쓴 이 글은 많은 의사들의 공감을 얻었다. 즉 의사들은 죽음의 시간이 가까워 올 때 대부분이 이를 받아들이고 극단적인 수술이나 약물 또는 실험적인 초현대적(?) 치료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의술의 한계를 알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면 왜 자신들과 달리 환자에게는 최첨단의 기술을 써 가면서 온갖 기계에 매달려서 구멍 마다 튜브를 꽂고 그 많은 비용을 쏟아 부으며 고생을 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우선 환자나 가족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야 한다’는 가끔은 현실과는 맞지 않는 요구를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에 만일 환자가 미리 적어둔 ‘어드밴스트 디렉티브(AD Advanced Directive)’가 있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이는 숨이 멎었거나 재생의 가능성이 희박한 경우에 응급 심폐 소생을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으로 환자가 의료진에게 내린 법적 명령인 셈이다. 이는 또 도저히 식사를 할 수 없는 경우에 튜브로 위에 음식을 투여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나 의식을 완전히 잃은 식물인간이 된 경우에 산소호흡기 등의 보조 장치를 끊어서 의미가 없는 삶 대신에 뜻 깊은 죽음을 맞게 해 달라는 등의 자신의 생사에 대한 희망사항을 적은 서류이기도 하다.

요즈음에는 작은 수술을 할 때에도 대부분의 병원에서 AD를 요구한다. 환자가 보호자와의 대화를 거쳐 이를 미리 작성해 둔다면 몇 년 전 플로리다의 어느 젊은 여성이 혼수 상태에 있는 동안 생겼던 친정 부모와 남편간의 법정싸움도 없었을 것이다.

쌍둥이 딸을 분만한 후의 합병증으로 젊은 엄마가 혼수 상태에 빠지자 친정 부모는 그녀를 집에 데려와 간호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 두 딸을 키우며 살던 아빠에게 아이의 방문을 요구했다. 하지만 아빠는 세 살 쯤 된 딸들이 혼수상태의 엄마를 만나는 것이 너무 큰 스트레스라며 거부했다. 소아정신과 의사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된다. 이 젊은 임산부가 일찌감치 AD를 써 놓았었더라면 이런 아픈 싸움도 없었을 것이다.

요즈음 소망소사이어티라는 한인 단체가 활발하게 이런 운동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노인이나 중년 들이 앞장서서 이 운동에 참여한다면 남은 식구들의 불필요한 혼란은 물론 본인도 고통스러운 현대 의학의 기술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준비된 어른’들은 AD 작성 이후에도 회생 가능성이 적은 악성 암이나 말기 질병이 닥쳤을 때 호스피스에 의뢰해 달라고 담당의사에게 요구할 수도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 그러나 죽음 자체보다도 사람들은 죽을 때 올지도 모를 심한 통증이나 아무도 옆에 없는 채로 외롭게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호스피스 프로그램이다. 생명을 연장시키려는 어떤 근본적 치료도 다 중지시키고 환자의 마음을 평화롭게 유지시키며 진통제를 투여하여 통증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누군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외롭지 않게 위엄있는 생의 마지막을 맞도록 도와 준다.

어머니와 우리 4형제들이 악성암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를 1년 반 전 하늘 나라에 보내드릴 때도 호스피스 프로그램 덕택에 사랑이 넘친 90세 생일 파티를 고별기념으로 해드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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