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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사생관 확실한 내세관  2010년 7,8월호 중에서

 

나원용 목사님과 홍양희 회장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 회장)의 대담

‘죽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받으시면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나는 죽음이란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이 보내주셔서 살던 사람이 하나님이 다음 세계로 이사 가라고 부르실 때 생을 마치고 떠나가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평시엔 죽음을 생각지 않으나 내 몸에 중병이 있다고 진단되거나 친척이나 친구, 교회 교우들이 중병으로 눕거나 죽게 될 때 내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대부분 죽음은 나에게서는 먼 것 같이 여기고 살고 있으나 건강이나 교통안전, 그리고 전쟁 등에 대해 예민한 것을 보면 언제나 죽음이 가까이에 있다고 잠재의식 속에 가지고 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목회하면서 죽음도 많이 보고 장례식도 하관식도 많이 보았으나 대부분 집례자의 입장, 목회자의 입장에서 위로하고 격려하는데 힘썼지 그때 그때마다 내 죽음과 밀착시키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나에게도 온다는 것을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생각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데 그 두려움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가끔 죽고 싶다고 하는데 사실은 다 죽기 싫어해요. 왜 그러는지 원인을 말하자면 첫째로 여기서 오래 살고 죽기 싫기 때문에 두려워해요. 끝나는 것 같아서요.
둘째는 죽는 과정이 고통스러워 보여 싫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암이며 치매며 움직이지 못하고 식물인간으로 투병하는 일들을 보면 자연히 두렵게 되지요.
셋째로 에릭 프롬이 말한 대로 ‘내 재산, 내 육체, 그리고 내 자아를 잃는데 대한 두려움, 즉 잃어버려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다 놓고 가는 일을 두려워하고 있지요.
넷째로 죽음 후에 형벌 받을 것 같아서 싫고 두려운 점도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이런 게 아니고 새 출발인 것을 믿고 알게 되는데 믿지 않고 모르니까 두려운 것이지요.

바른 사생관을 갖는 것이 중요

오랫동안 목회하면서 목사님께서는 교회에서 죽음에 대한 설교를 어떻게 하시는지요. 기독교의 죽음관을 설명해 주십시오.

죽음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오해하거나 기피하려 한다든지 염려하여 두려워하고 있는 회중들을 바른 사생관을 갖게 하는데 중점을 두고 설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남의 일로만 생각하거나 먼 훗날에 있을 일로 생각하고 우선 눈앞에 있는 일들이나 세상에서 필요한 일들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쉬운데 죽음은 멀고도 가까운 데에 언제나 있고 나와도 직접 관계가 되어 있는 중요한 일임을 깨닫고 준비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기독교의 죽음관을 그 뼈대만 말하자면,
첫째로 죽음이란 피조물 된 인간들이 조물주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지은 죄(원죄)의 결과이다.(창2:17.3:19)
둘째로 죽음이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이 치러야 할 죄 값을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다 치르시고(대속하시고) 해결해주신 일이다.
(요3:16,벧전1:19)
셋째로 죽음이란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이들에게는 육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영생의 나라(하나님 나라)로 이사가는 길이요 (새로 시작하는) 일이다.(고전5:51-52)

죽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겐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요3:16)
길이라는 것이요, 새로 영원한 삶을 시작하는 새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마7:13)이라는 것입니다.

<삶과 사랑과 죽음> 2010년 7,8월호 중에서

사후생을 믿고 아니 믿는 것이 우리의 현실 삶에서 어떠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십니까?

사후생을 믿고 안 믿는 일이 오늘의 현실 삶에 미치는 영향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다고 보이는데, 먼저 밝은 면으로는,

첫째로, 소망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고 봅니다. 이 세상에서는 선과 악, 의와 불의에 대한 결말이 나지 않는 면이 있어 한편 의로운 이들이 악한 불의한 세력에게 눌리고 억울을 당하는 일이 많으나 사후생에서 다 심판 받고 상선 벌악(償善 罰惡)될 것 생각하면 희망이 생깁니다. 물론 상급이 없어도 선과 의를 따라야 하지만 심판과 보상이 있다는 것은 희망을 주는 일이요.

둘째로 오늘 여유 있게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받으면 좋으나 주기는 어렵고 말하기는 좋으나 실천은 어려운데 사후의 삶이 있음을 믿으면 오늘 여기서부터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여유있는 삶, 따스한 삶을 갖게 됩니다.

셋째로 선택의 자유를 바로 행사하게 되는 밝은 면이 있게 됩니다. 나의 오늘의 선택은 오늘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그 결과가 내세에까지 가게 될 것 그리고 그 선택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아닐 때 반드시 그 결과가 들어나게 된다고 할 때 오늘 선택을 신중하게 하는 밝은 삶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두운 면도 있습니다. 물론 잘못 생활할 때 되는 일이지요.
먼저 내세에 가면 다 소용없으니 오늘 그렇게 고생하고 애쓸 것 없어 하며 적당히 살려고 하는 일 다음으로 천국에 가면 다 잘될 텐데 여기서 하나님 나라 세우려고 애쓸 것 없어 하는 잘못된 태도를 갖기도 쉽습니다. 끝으로 잘못했다가 내세에 가서 벌 받을까봐 겁나서 아예 아무것도 못하기가 쉬운 그런 어두운 점들도 있습니다.

좋은 죽음은 평안한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좋은 죽음을 말씀해 주십시오.

안방에서 배게 베고 잠자다가 죽을 수 있을지 그렇지 않고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마지막을 맞을지 그리고 언제 그 죽음이 올지 시간도 모릅니다.

누구나 평안한 죽음, 마음도 편하고 몸도 고통 없이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마는, 어찌 될지 모르기에 죽음을 앞둔 우리로서는 ‘어떤 경우에든 좋은 죽음을 죽을 수 있도록 평시에 준비된 죽음이 좋은 죽음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평시에 준비할 일은 먼저, 마지막 순간까지 나와 온 인류를 위하여 그 피로 속죄하시고 사망을 이기신(요19:30) 나사렛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죽는 죽음이 좋은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사랑으로 이 땅에 오셔서 뜨거운 사랑으로 십자가를 나와 우리 대신 져주신 사랑의 주님 따라 사랑으로 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마11:28)고 하신 주님의 사랑의 품에 맡기며 떠나는 죽음이 참 좋은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께서 죽은 과정에서도 함께 하시고 이렇게 믿음 안에서 소망 중에 사랑의 삶을 살다가 사랑의 품에 안기며 떠나는 죽음이 참 좋은 죽음입니다.

대가족 제도에서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배웠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죽음을 어떻게 이해했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일깨워야 할 내용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어린이, 청소년, 노인들에게 죽음 교육이 필요하다면 대상별로 가장 강조할 점이 무엇일까요?

그렇죠. 대가족 제도에서는 생로병사가 항상 있어왔고 이웃집에서도 즉 우리 마을 안에 그런 일이 계속 되었으며 거의 자기 집 일과 같이 보고 느끼며 겪으면서 아기는 태어나고 자라고 일하다가 늙으면 돌아가는 것이 사람의 길이로구나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배워왔습니다.

대가족제도 시절을 생각하며 일깨움을 받고 싶은 점은 ‘죽음’을 ‘돌아가시는 일’로 여겼던 일입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출발점을 전제한 말이요. 집을 떠났으며 언젠가는 돌아오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겼다는 점 그리고 누구나 다 라는 점도 좋고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테니 목적을 잘 이루고 가야겠다는 뜻까지 있어서 참 좋은 표현이었습니다.
죽음준비교육에서 강조할 점으로는 먼저, 어린이들에게는 사람은 살다가 누구나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일 그게 죽음이라는 것을 잘 설명해 주어야겠습니다. 몰라! 어디론지 가셨어! 이젠 끝이요! 그러지 말고 사실대로 가르칩시다.

다음으로는 청소년들에게 강조할 점은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보내셔서 왔다는 점과 부지런히 일하며 가치 있게 살다 오라고 보냄을 받아 왔으니 그분의 뜻을 따라 죽을 때까지 공장이든 농장이든 백화점이든 연구실이든, 국회이든 우주를 왕복하든지간에 이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값지고 보람되고 재미있는 삶을 살다가 가야겠다는 점을 강조해야겠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가기 위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를 바로 믿고 따르자고 강조해야겠습니다.

끝으로 노년들에게는 그동안 걸어온 그러면서 바로 보며 살아왔고 힘냈던 일 계속하자고 강조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을 강조해야지요. 아무리 노년이 되었어도 그 정체성을 늘 의식하고 죽음, 부활, 영생이 앞에 있음을 확신하는 믿음 위에 끝까지 굳게 서도록 강조해야겠습니다.
‘소망을 또한 강조해야겠습니다. 추운 겨울이 있으면 그 다음엔 틀림없이 새 봄이 온다는 일, 죽음 몸에게 무슨 봄이냐고 하는 생각이 들기 쉬운데 그러기에 말씀만 하시지 않으시고 친히 예수님이 부활해보여 주시고 영원한 나라로 승천해가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으니 예수님을 소망으로 바라보며 노경을 힘차게 살자고 강조해야겠습니다.

끝으로 ‘사랑’하는 삶을 오늘 여기 있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한 길로 실천하며 살기를 강조해야겠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막 12:29-31) 고 하신 말씀대로 사랑하는 삶을 이 인생의 오후에도 살다가 영원한 사랑의 나라로 이사 가는 사랑의 삶을 살자고 강조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죽음을 배워야 한다면 꼭 해야 할 일 또는 간과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목사님께서는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죽음이 무엇인지 사생관 교육이 간과되고 있으며 확실한 내세관 교육도 간과되어 있다고 봅니다.

사람의 생명을 맞이하는 일을 위해서는 수많은 산부인과가 있고 생명의 출산에 대한 교육이나 의료적인 돌봄도 많지요.

그리고 그 생명을 유지 발전하는 데와 연령에 따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도 많으며 노경에 이르러 죽음이 일반적으로 가까워졌을 때나 그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이 왔을 때 이를 피하거나 죽음을 연장시키기 위한 노력은 저 수많은 병원과 의과대학과 본인들의 힘씀이 대단하지요.

그러나 이런 노력에 비하면 언젠가는 필연코 겪게 되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서는 겪어야 할 본인이나 사회나 그저 싫어하고 피해보고 연장시켜 보려는 노력에 비해서 그 죽음이 무엇인지 그 죽음 넘어서는 생명이 계속 되는 끝나는 것인지 구체적인 교육이 종교계통을 제하고는 우리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현실입니다. 그러기에 시급하고 절실한 과제는 사생관 교육과 내세관 확립이라고 믿습니다. 앞으로 되도록 속히 그 실현의 길을 연구도 하고 실천도 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책임이 교회 안에서나 사회 안에서 참으로 크다고 여깁니다.

나 개인이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고 있느냐고요?

나는 앞에 말한 것과 같이 내가 믿고 알고 또 설교하고 가르치고 있는바 대로 마음 준비하고 믿음으로 소망 중에 사랑하면서 죽음을 맞고 싶으며 그런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기본자세이고 구체적으로 죽을 때 어떤 유언을 남길 것이냐 그 유언 속에 모든 정산원칙과 바라는 바가 적히겠지만 아직 그런 유서 같은 것을 작성한 일은 없으며 구체적으로 준비가 없고 기본자세만 갖추고 할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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