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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을 넘으면 새로운 세계가 있는거죠 / 대담

 

정 희 경
전 이화여고 교장
남북적십자회담 대표
현대고 교장
현 청강문화산업대 이사장

옷깃에 태극기 뺏지를 달고 흰옷을 입은 모습은 이화여고 출신의 유관순 열사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애국’하는 마음에서 달았다는 설명에 놀랐다. 너무 오랜만에 들어본 단어인지라. 저런 어른이 많은 나라여야 할텐데… 그 당당한 애국심이 교육자로, 남북적십자회담에 대표로 남북화해의 밑거름역할을 했으리라 짐작한다.

누군가의 죽음에서 처음으로 죽음을 진지하게 여기는데 그런 충격을 받은 죽음이 있었는지요?

“고등학교 2학년때 남동생이 병으로 앓다가 죽었어요. 한창 사춘기라 민감할 때 닥친 동생의 죽음은 상처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4남매중에 제일 가까웠거든요. 그 때문에 신앙적으로 방황하기도 했구요. 불교도 기웃거리고 그러다가 기독교에 더욱 가까워지고. 다음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건이죠. 정서적으로 중량감이 크게 느꼈어요. 마지막은 13년 전에 돌아간 舍廊(사랑)의 죽음이죠. ”

정희경 선생은 남편을 ‘舍廊’이라고 부르셨단다. 옛날부터 남편들은 사랑채에서 지냈기 때문에 호칭이 당연히 ‘舍廊’이란다. 깍듯하고 예의바른 가풍이 요즈음의 우리들도 배울 일이다. 사랑채에 머무시는 분도 좋고 사랑하는 사람이니 사랑이라 부름도 무방한 듯하다.

“이렇게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일 때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스스로의 죽음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죠.”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고 나이도 다른 이 분들의 죽음에서 겪은 감정의 변화는 어떤 건가요?

“어린 동생의 죽음은 허무함을 안겨줬어요.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은 허무함보다는 보고 싶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어서 용인에 산소를 모셨는데 1주일에 한번씩 다녔어요. 그러다가 2주일에 한번, 한달에 한번씩 가며 애도하는 시간이 길었어요. 슬픔을 풀어내는데 시간이 필요했던 거죠. 그게 1년반이 걸리더군요. 사랑의 경우에는 산소엘 자주 가지 않아요. 평생 동안 쓰던 소중한 장막이 무너져서 있는 곳이란 생각만 들어요. 거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대신 사진을 보고, 하늘을 보고 사랑과 이야기를 해요. 그만큼 신앙이 성장한 거예요. 지금은 ‘그립다’ 라는 것을 무덤에 가서 푸는 게 아니예요. 버리고 간 장막을 모셔놓는 곳, 상징일 따름이죠. 죽음과 신앙의 성장이 함께 했어요.”

-죽음 때문에 일상생활이 흔들리는 경우가 많아요. 무섭거나 두려움을 줄 수도 있는데.

“죽음은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죠. 그래도 죽음 자체에 슬픔은 있어요. 나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도. 하지만 그게 무섭다거나 두렵다거나 이상하지는 않아요. 사랑이 가고 나서 더 절실히 느껴요. 그 당시 미국에서 언니가 왔는데 40일을 같이 있어줬어요. 내가 두려워할까 혹시나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해서 떠나질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단 한번도 공포감을 경험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내 죽음과도 관계가 되는 거니까요.”

-죽음에 연연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자신감과 열정으로 사셔서 그런가요.

“세상에 가진 것을 다 주었어요. 이미 다 주었어요. 더 받고 싶은 것도 없어요. 이건 전혀 비관적인 생각이 아니에요. 그래서인지 ‘너무 이 세상에 오래 두지 마십시오’가 기도제목이에요. 그렇게 오래 살고 싶지 않아요. 내 딸은 하나님께 건방진 소리라고 나무라지만…. 오래 사는 것에 매달리지 않는 게 신앙생활 하는데 독특한 점이 아닌가 싶네요.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구구팔팔이삼사란 말이죠. 생로사면 좋겠는데 불행히도 생로병사인걸 보면 병이라는 과정도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불가피한 거예요. 혼자서 기동할 때까지만 살기를 바라죠.”

-희수연 기념으로 낸 ‘삶, 그 신묘한 색채들’의 책제목처럼 뜨거운 인생을 살았고, 생사관도 군더더기가 없네요. 부부애가 유난하셨다고 들었어요.

“나름대로 아름다운 색깔 있는 인생을 살았어요. 그걸로 충분하지 거기다 덧칠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생전에 사랑은 75세까지는 살아야 하나님께 체면치레가 된다고 했는데 67세에 갔어요. 그런데 난 77세까지 살고 있으니 책임분량은 한거지요.
생사관을 조금 담담하게 가지는 연습을 해야 되요. 늠름하고 자신만만하던 분들도 늙고 아프면 겁내고 약한 모습을 보게 되요. 제발 그러지 않기를 기도하죠. 죽음을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돼요. 아름다운 문턱이 있어요. 문턱을 넘어가면 되는 거죠. 넘어가면 새로운 세계가 있는 거죠.”

-어떤 생각과 바램을 갖는가가 어떤 죽음을 맞이하나와 밀접한데, 지키시는 원칙이 있으시다면?

“‘아침에 일어나서 나라가 편안하게, 너무 오래 머뭇거리지 않게’가 내 짧은 기도 속에 꼭 들어가요. 사생관을 믿고 의지하는 게 든든하고요.
의외로 여성지도자 중에 요란하게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은데 그러지 않게 되기를 바래요.
슬픔은 남은 사람의 몫이죠.
우리 가족이 아주 감정적이어서 많이 서러워 할 것 같아요. 예전에 이화여고 교장으로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엄청 울었어요. 발인식 때 너무 많이 우니까, 주변에서 우리 교장선생님 ‘너무 무식하게 운다’라고 했대요. 아버지에게 살뜰하게 하지 못한 죄송함 때문에 더 울었죠. 자식들한테 ‘너희들 너무 슬퍼하지 마. 나 저쪽 방 갈 거거든’ 이라고 유머러스하게 넘어가면 좋겠다 라는 생각은 해요. 죽어도 그런 여유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죠.”

교육, 여성활동 중 요즘 특히 관심 두는 분야가 있으실텐데.

“우리 사회에 아픈 데가 많은데 그런 곳을 어루만져주는 여성운동으로 가야 되요. 투쟁적으로 가거나 단절로 가는 건 문화나 역사를 뒤집는 거예요.
지난 세월동안 필요한 데 쓰임을 받아서 일했지만 내 것이라고 영역 짓는 일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여성단체를 만들고 장이 되는걸 꺼려해요. 일가재단, 각당복지재단, YWCA를 후원하는 것도 같은 이유지요. 가치있는 일이라고 판단되니까 털어버리는 거죠. 난 ‘털어버린다’ 하는데 그것도 죽음준비라고요. 내가 가진 재산은 한사랑재단을 만들어서 문화소외지역 사람을 도와주고, 문화교육에 쓰려구요. 위원회 만들어서 적절한 곳에 쓰면 되겠길래 이사장 자리도 마다했어요.
심플한 삶이 축복받은 삶이예요. 단순한 아름다움이 크죠.

“하나님 단순하게 살게 도와 주십시오.
단순하게 하늘나라에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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