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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슬기보다는 닳아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2009년 1,2월 중에서

 

방지일 목사

1911년 평북 선천 출생
1958~1979 영등포교회 목사
숭전대학교 명예철학박사, 장로교 신학대학교 명예 신학박사
현재 영등포교회 원로목사, 재한 중화기독교 유지재단 이사장

방목사님과의 만남은 경이로움의 연속이다. 98세의 연세가 그러하다. ( 2009년 1월 시간) 1937년에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작년에 70주년이 지났다. 1937년부터 1958년까지 중국 공산 치하에서 21년간선교활동을 했다. 중국에서 귀국해서 1958년부터 시작한 월요성경공부 모임은 50년이 되었다. 앞으로 누구도 깨기 어려운 기록적인 시간임에 틀림없다. 일년 내내 강연, 선교여행, 인터뷰 등 일정이 가득하다.

“저는 녹슬기 보다는 닳아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백수를 앞둔 목사님의 말씀에서 청년의 기백을 볼 수 있다. 목사님 사전에 은퇴란 말은 없다. 현장 목회자만 있을 따름이다.

-장수목회를 할 수 있었던 특별한 건강비결이 있나요?

“이렇게 오래 살 줄은 몰랐어요. 173cm 키에 53kg정도 나가서 젊어서도 ‘바람불면 날아갈까 조심해라’ 했을 정도예요. 아버님이 68세에 돌아가시고, 숙부님도 78세에 돌아가셨어요. 우리 집안에서 제일 오래살고 있는 거죠. 아직까지 보청기 없이 들을 수 있고, 내일 백내장 수술을 받기로 예약이 돼있어요.”

-귀와 눈이 좋다는 건 건강을 타고나셨다고 보이는데요, 달리 불편한 데는 없으신가요?

“자식들이 미국에 있는데 백내장 수술 때문에 전화가 왔어요. 걱정스러워 하는데, 그저 수술이 잘되리라 믿고 맡기는 거죠. 다리가 좀 불편하긴 하지만,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이 날 부르시면 간다고 생각해요. 오늘이 마지막인가 싶기도 하고……. 사람이 한 번 나면 가는 것이 정한 이치(히 9:27)이니 죽음도 일상 속에 있어요.”

죽음을 앞두고…
‘주님 어서오세요’

-기독교 신앙 속에서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믿는 사람은 잘 준비하고 있다가 아무 때 가도 되는 거예요.
첫째 모든 부족한 죄를 찾아서 고백해야 되고,
둘째 내가 구원 받았으니 남을 구원해야죠. 죄를 깨끗이 씻고 복음을 전하는 이 두 가지가 죽음을 앞두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이죠. 그리고 ‘주님 어서오세요’ 하고 대답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아직 하나님이 데려가시지 않는 건 준비가 덜 되었다고 보시거나 할 만한 일이 남아있어서 기다리시는 건지……. 하나님이 하루를 천년같이 참으면서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고 했는데, 주님 오실 때까지 날마다 시간마다 회개해야죠.”

-생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일수록 죽음을 금기처럼 여기며 얘기조차 꺼려하죠.

“사람이 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본능이예요. 우리가 본능이나 애착에 얽매여 살기 때문에 다 그렇게 완전하지가 못해요. 그렇지만 바울의 말처럼 얻으려고, 이루려고, 잡으려고 앞을 향해 달음질하잖아요. 하물며 베토벤 같은 거장도 미완성교향곡이 있어요. 우리도 완성을 기대하면서 가는 거죠. 그러면서 금기도 조금씩 극복이 되고.

결국 죽음도 종교도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야 돼요.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해요. 기도하는 사람은 죄를 찾는 현미경이죠. 내일은 1000배, 모레는 1500배 이런 식으로 배율을 올려야 돼요. 말로 할 수 있는 죄, 말로 할 수 없는 죄를 현미경으로 찾아내서 주님 오시는 날까지 기도해야 돼요.”

순간적인 경험이나 간증에 의지하지 말고
성경을 통해 깨우쳐야죠.

-어떤 죄도 체로 걸러내듯이 걸러내서 마지막 죄까지도 고백해야만 되는군요.

“주님 오시는 날까지 죄를 찾아야죠. 통회하고 씻어야 하구요. 순간적인 경험이나 간증에 의지하는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성경을 통해 깨우쳐야죠.”

-중국선교는 어떻게 21년이나 할 수 있었나요?

“중국공산치하 초기에는 외국인 선교사가 나밖에 없으니 가만히 놔두더군요. 그러다가 내 신상을 낱낱이 파악한 다음에 취조하기 시작하는데 몇 백명이 철학, 역사 ,성경을 돌아가면서 질문을 하는데 그 답을 척척 받아냈어요. 공산당이 눈이 휘둥그레지죠. 어떻게 그렇게 대답했는지 하나님의 역사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어요. 성령의 힘을 절감했죠. 또 일체 정치적인 활동은 하지도 않았고. 그러니 걸릴 게 없었어요. 또 중국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되어 있어요. 젊을 때 일제치하에서 신앙생활하고 글 쓰던 때보다 공산당의 감시는 조직적이고 지독했어요.”

-눈엣가시 같으니 추방하려고 했겠네요?

“중국공산당은 중국내 어디에 가든 집도 주고, 도와주겠다고 회유했어요. 중국에 선교하러 간 거지 밥 먹고, 살러 간 게 아니잖아요. 법에 의해서 중국에 들어왔으니 법대로 하겠다고 3년간 모택동과 서면 담판을 벌였어요. 그러다가 이 사실이 UN에까지 알려졌죠. 결국 홍콩으로 추방을 당했다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어요. 나하나 잡기 위해서 모든 선교사들을 다 간첩이라고 몰았어요. 일본어를 할 줄 알면 일본 간첩으로, 영어잡지가 있으면 미국간첩이라는 식으로. 내 측근들을 통해 증거를 잡아내서 죄를 만들어 내려고 혈안이 되더군요. 아무리 뒤져봐도 복음 전하려 했다는 사실만 드러날 뿐이었죠.”

-중국선교의 감회를 돌아보신다면.

“중국이 공산화 된 후 9년간의 선교는 억압과 핍박의 연속이었어요. 대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깊이를 깨우쳐 주는 시기였어요. 하나님과 더 가까워진 경험을 선물 받았어요. 중국에서 전쟁을 다섯 번 겪고, 피난 다니면서 중국교인들과 아무 간격 없이 지냈어요. 한 가족처럼 지내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지요. 나를 하나님의 사자라 여기고, 자기가 받은 배급품을 밤에 몰래 던져주는 그런 지극한 사랑을 받은 목사는 드물 거예요. 부산에 도착하고 나니 성경책 사이에서 중국돈 20원이 발견됐어요. 중국돈 20원이면 한달 생활비가 넘는 큰 돈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넣어둔 거죠.”

-월요성경공부모임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1958년 영등포교회 담임목사시절에 시작해서 매주 월요일 마다 성경공부를 했어요. 성경 66권을 통독하고,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식으로 했어요. 목회자나 교파를 가리지 않아서 알음알이로 찾아왔어요. 출석을 부르는 것도 아니고 자발적인 모임으로 50년간 2000명 쯤 다녀간 것 같아요.
때로 해외 선교지 방문 때문에 불참하게 되면 미리 카셋테잎에 녹음해서 대신하기도 했어요. 모든 공적인 행사도 월요일에는 피하게 했어요. 서로의 신앙에 자극도 되고, 목회방향을 설정하는데 도움이 되었지요.”

믿음은 자기 스스로를 없애가는 과정이죠

-녹슬지 않겠다는 것은 비장한 각오로 일하다 죽겠다는 다짐인데, 어떤 죽음을 바라시나요?

“나는 부족하지만 내 죄를 대신해서 죽은 예수님을 쳐다보면서 감사하며 죽을 수 있다면 제일 행복한 죽음일 거예요. 예수님이 나 대신 죽은 것을 알고 감사드리면, 예수님이 더 기뻐하세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믿음이고, 믿고 아는 것이 참신앙이예요. 믿음은 자기 스스로를 없애가는 과정이죠. 나를 내세우고 이름을 내세우려 한다면 그 순간 믿음은 사라져버려요. 종교가 있는 사람은 ‘온 곳이 있고, 갈 곳이 있다’라는 걸 알아요. 성령이 날 인도한다는 확신이 있어요. 매순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면 결국은 녹슬고 말죠.”

목사님 홈페이지 첫 장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애굽기14장14절)와 환하게 웃는 목사님 사진이 있다.
백내장 수술을 마치고 2009년 1월에 미국 플로리다로 선교여행을 계획하는 모습은 도전과 패기의 젊은 목회자 모습이다.

<삶과 사랑과 죽음> 2009년 1,2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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