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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만 버려도 행복하다  2009년 9, 10월호에서

 

 

이 정 옥 선생(전 동아일보 기자, 시인) / 장세리 편집위원 대담

이정옥 선생은 숙명여대 국문과를 나와 20여 년간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일했다. 그래서인가 말과 글에 꾸밈이 없이 쉽고 편했다. 아마 지나온 삶도 분명 깔끔했으리라 짐작이 된다. 그간 두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수필집을 내고, 올 봄에 ‘반만 버려도 행복하다’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은 자신이 실비요양원에서 10년간을 지내오면서 체험한 주변 노인들의 다양한 삶을 보며, 스스로도 노인이 되가는 과정을 받아들이며 제대로 살려면 어떻게 덜어내고 비워내야 하는가를 일깨워준다. 가진 것 반만 버려도 행복이 가득하리라는 메시지를 남기며 다가올 죽음도 품위있게 마무리하고픈 노년과 죽음에 대한 고백이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죽음은 무엇인가요?

“전생이 없고 현세만 있다면 우리는 어디서 왔을까요? 현세만 있고 내세가 없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요? 유혹을 물리치며 지켜온 양심,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랑, 마지막 순간까지 불태운 삶에 대한 열정…. 이 모든 이야기가 육신의 죽음으로 끝이라면 너무 허망하지요. 죽음을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영혼의 고향은 영원이고 우리의 영혼 또한 영원한 것이니 한마디로 ‘죽음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육신이 흙이 되고 물이 될 때 영혼이 돌아가는 곳은 또 하나의 광활한 우주, 영원이라는 이름의 행성일 거라고요.”

-일상생활에서 죽음을 생각하실 때 주로 어떤 생각을 하나요?

“봄날 꽃이 지는 것을 보면서도, 가을날 낙엽을 밟으면서도 죽음을 생각하지요. 친구의 평화로운 죽음, 이웃의 안타까운 죽음을 볼 때도 죽음을 생각하지요. 그때마다 저는 살림살이를 정리합니다. 사람들은 떠난 사람이 남겨놓은 것으로 ‘삶의 성적표’를 매기게 되지요. 제 성적표를 매길 사람들의 노고를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버릴 것은 미련 없이 버리자, 줄 것은 하루 빨리 주자!’ 이게 죽음 준비를 위한 제 생활신조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안고 있는 죽음에 대한 문제는 삶과 죽음을 분리하는 데서 오는 것 같습니다. 성현들이 죽음은 삶의 마지막에 오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부터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난 적 없는 길동무였다고요. 현학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죽음이 삶이고 삶이 죽음’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무섭고 두려워하는데 그 두려움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죽음은 통증과의 싸움이라는 생각이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의술의 발달로 통증완화치료가 진일보했지만 죽음을 이기려는 의료계의 열정과 가족의 열망 때문에 죽음의 순간까지 통증과 싸우다 떠나는 환자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삶에 대한 의지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필요한 것이지만 그 의지만큼 통증 없는 죽음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둘째는, ‘아직도 내 삶은 미완성’이라는 생각이 무의식 밑바닥에 깔려있기 때문일 겁니다. 인생은 백년, 이백년을 더 산다하여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인생은 릴레이 경주와 같아서 내가 못다 한 부분은 다음 선수가 맡게 되어 있지요. 저는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다음 말을 좋아합니다.

‘삶은 어떤 것을 이루어 나가는 일이다. 그리고 죽음은 그 이루어 나감의 완성이다.’

죽음의 순간이 각자 삶의 완성이라고 생각하면 원망, 애석함, 후회, 두려움 등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일반인이 생각하는 죽음 이해와 교회에서 가르치는 죽음 이해가 다르죠?

“일반인이 상상하는 죽음의 색깔이 먹빛 어둠이고 정처 없는 유배지의 암울함이라면, 교인들이 생각하는 죽음의 색깔은 천국에서의 영생이고 하느님과의 만남이니 희망의 초록이고 평화의 하늘색이지요.

하지만 실제 죽음 앞에서의 태도는 일반인과 교인의 차이가 아니라 개인의 죽음에 대한 철학 차이로 보여요. 어느 종교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던 친구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던 적이 있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을 원망하고 몸부림치다 떠나는 교인을 본 적이 있거든요.”

– 事後生을 믿고 안 믿는 것이 현재 삶에 어떤 영향을 줄까요?

“사후생의 믿음이 삶의 태도에 미치는 영향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사후생을 굳게 믿는 신앙인 가운데도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분이 있는가 하면, 비신앙인 가운데도 헌신적이고 정의감이 투철한 분도 있지요.

1950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버트란트 러셀은 20세기 지성인 가운데 가장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끼친 분입니다. 그런 분이, 자신이 기독교인이 아닌 이유를 당당하게 글로 발표했습니다. 그럼에도 어느 신앙인보다 더 신앙적인 삶을 살다 떠났지요. 삶에 정직했고 죽음에 태연했으니까요.

인간은 종교성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말이 있지요. 엄밀히 말해 무신론자까지도 신앙인이라는 뜻이지요. 인간에게 주어진 고귀한 양심, 그게 바로 종교성이라 보면 될 겁니다. 실제로 신앙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선한 사람은 천국 가고 악한 사람은 지옥 간다는 권선징악 사상은 교회의 탄생 이전부터 인간 양심에 깊이 뿌리를 내려왔으니까요. 그 뿌리 위에서 종교가 성장했다고 볼 수 있지요.”

– 좋은 죽음은 평안한 죽음이라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좋은 죽음은 어떤 건가요?

“<아직도 가야할 길>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미국의 의학박사 스캇 펙이 ‘좋은 죽음’을 위한 다섯 가지 조건에 대해 말했지요. 그는 좋은 죽음이라는 말 대신에 ‘훌륭한 죽음’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훌륭한 죽음이 되기 위해서는 의식을 잃기 전에 다음의 조건이 반드시 실행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 자살이나 살해가 아닌 자연사라야 하며, 둘째 육체적으로 통증이 없어야 하며, 셋째 떠나는 이와 보내는 이들 사이에 화해가 이뤄져야 하며, 넷째 본인이 병의 진행에 대해 알고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며, 다섯째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었다는 표현으로 사별인사死別人事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불의의 사고나 갑작스런 발병으로 위의 조건을 갖추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때를 위해 유언장이나 사전지시서死前指示書, 즉 <존엄한 죽음을 위한 선언문> 작성이 필요하지요. 존엄사를 안락사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존엄사는 인위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끊는 안락사가 아닙니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무의미한 연명장치를 제거하고 통증치료만 하여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자연사의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좋은 죽음이란 세상과 화해하고 가족에 둘러싸여 작별하는 것이지요. 삶이 존엄하다면 죽음도 존엄해야 하니까요.”

-어린이, 청소년, 노인에게 죽음교육이 필요하다면 대상별로 가장 강조할 점은 무엇일까요?

“바람직한 죽음교육은 하느님의 창조질서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자연을 통해 느낄 수 있게 한다면, 죽음도 자연 질서의 하나로 평화롭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죽음교육의 내용이 이런 차원에서 진행된다면 좋을 것 같은데요.

어린이의 경우를 생각해보죠. 장마철 떨어진 능소화 한 송이를 들고, ‘자기 삶을 다하고 떠나는구나. 이건 멍멍이와 철수의 죽음과 다를 것 없는 꽃의 죽음이란다. 아름답지 않니?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순응하는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거란다.’

나비 표본을 가리키며, 사라지는 구름을 바라보며 인간의 죽음도 이와 다를 것 없다는 것을 인식시킬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어린이의 죽음교육이 되지 않을까요? 어릴 때부터 죽음이라는 어휘를 자연스럽고 담담하게 접하게 하는 것이 좋겠지요.

청소년들의 죽음교육에서는 건강을 위한 절제의 미덕을 가르칠 필요가 있어요. 만일 알코올중독으로 뇌가 손상되면, 마약 등 약물의존으로 행동장애자가 되면, 니코틴 중독으로 폐가 망가지면 어떻게 되는가를 의학적인 통계 등을 제시하면서 교육해야겠지요. 각자에게 주어진 생명은 존귀한 것이므로 마음대로 망가뜨려서는 안 되며, 최선을 다해 죽는 날까지 소중히 간직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겠지요.

소생이 불가능한 80,90대 노년들에게 죽음을 유예시키는 연명장치의 남용은 생명존엄법이 아니라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대한 의술의 만용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노인들에게는 품위 있는 죽음의 준비로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려주고 용기를 심어주는 일이 시급하다고 봅니다. 국토는 한정되어 있는데 죽어서까지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땅을 차지해야 하는지? 과거의 장묘문화에 대한 점검도 필요하고요.”

– 오늘 우리사회가 죽음을 배워야 한다면 꼭 해야 할 일 또는 간과하고 있는 것들이 있죠.

” 옛 사람들은 인간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로 태어나고, 시집장가가고, 죽는 것을 꼽았지요.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거부하는 쪽으로 돌아선 것 같습니다. 근대의학을 주범으로 지적하는 분도 있습니다. 지난 50년 사이에 이뤄진 의술의 개가는 기적에 가깝죠. 이 결과 한때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자만에 빠져 냉동인간, 복제인간을 운운하며 사람들을 현혹시키기도 했고요. 지금은 선진국 의료계가 죽음교육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 일례로 호스피스 전문병원들을 세우고 있지요.

창조질서의 순환으로 죽음을 바라볼 때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함께해온 친구에게 속삭이듯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거지.’
우리사회가 간과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사회인식에서 법조항에 이르기까지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배려를 외면하고 있는 점이 안타깝지요.”

-선생님 자신의 죽음 준비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 첫 번째 준비는 2000년 가톨릭의대에 시신기증 절차를 밟은 겁니다. <시신등록증>을 지갑에 넣고 다니지요. 그때부터 하루 24시간 외출도 함께하고, 산책도 함께하는 죽음의 후견인이 생긴 셈이지요. 제 죽음의 순간을 감당해줄 후견인이 항상 제 곁에 있으니 죽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지요.

두 번째는 2004년 12월에 서명한 <존엄한 죽음을 위한 선언문>입니다. 어느 날 제게 찾아올 죽음이 어떤 모습을 하고 오던 그 싸움은 짧게 끝날 겁니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지요.

세 번째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난 겁니다. 과거는 이제 제 몫이 아니지요. 저의 과거는 하느님 손에 넘겼습니다. 색칠이 엉망이 된 그림이니 부끄러워도 한참은 부끄럽지요. 하지만 잘못 칠해진 부분을 지우개로 북북 지울 수 있는 분이 하느님 아닙니까?

네 번째는 재산정리에 대한 문제겠지요. 마지막 정착지로 요양시설을 결정한 10년 전에 정리하여, 죽는 날까지의 생활비를 일시로 지급했지요. 지금은 땅 한 평도 없는 빈손입니다. 얼마나 홀가분한지 모릅니다. 노인의 행복이란 따뜻한 잠자리, 소박한 밥상, 친구와 나눌 수 있는 차 한 잔, 그 정도면 족하지 않을까요

<삶과 사랑과 죽음> 2009년 9, 10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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