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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업을 하는 사람은 마이너스로 살아야 해요  2009년 11, 12월호 중에서

 

윤 광 석 선생님 ( 전 한사랑 마을 원장)

장세리 편집위원 대담

시간은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된다. 1996년 한사랑 마을의 원장이었던 윤광석 선생은 각당복지재단의 자원봉사교육에 강사로 초빙된 적이 있다. 1988년에 개원한 한사랑마을엔 중증장애인만 150명이 넘게 생활하고 있었다.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단 1명도 없이 모두 누워만 지내는 상황이었다. 20명의 직원이 돌본다는 게 감당이 안 되었다. 인근의 학교와 군부대에 도움을 청했다. 그렇게 시작된 집단자원봉사의 사례는 다른 복지시설에까지 퍼져서 장애인과 비장애인간의 교류와 나눔이란 큰 열매를 얻었다.
50년간 오로지 장애인복지분야 외엔 고개 한 번 기웃거린 적이 없는 선생께서 지금 관심을 갖고 있는 대목은 노년의 삶이다. ‘어르신사랑연구모임’에 가입해서 노인복지로 관심을 넓혀가는 중이다.
결국 ‘복지’와 함께 하는 한평생이다.

-사회복지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경남 진해가 고향인데 고등학교 때 6.25가 터졌어요. 고3이 되니까 대부분이 군대 가고 남학생은 3명밖에 없었어요. 3명이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하면서 어떤 학과를 갈 건가 장래에 대한 의논을 했어요. 토마스 아퀴나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을 읽고 예수님이 이 땅위에서 한 일을 본받자고 결론을 냈죠. 첫째, 복음을 전하자 둘째, 가난한 사람을 돕자 셋째, 아픈 사람을 도와주자고. 그래서 한 친구는 서울대 종교학과를 가고, 다른 친구는 경북대 의대를 갔죠. 난 적록색약이 있어서 군면제를 받고 원래 사회사업과를 가길 원했는데 당시에는 그런 과가 없어서 연세대 신학과에 들어갔어요.”

-3명이 다 뜻을 이루었나요

“종교학과에 간 친구는 목사가 되지는 않았어요. 의대를 간 친구는 부산에 있는 고신의료원 원장이 되고 나도 졸업은 못했지만 1957년부터 시작한 사회복지일을 지금껏 하고 있으니 뜻한대로 산거죠.”

봉사는 하되 시설은 소유하지 않겠다

-처음에는 고아원에 있었죠

“전쟁 나서 부산에 있을 때 고아원 운영하는 사람들을 봤는데 참 못마땅했어요. 전쟁고아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원장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을 보게 됐어요. 그때 다짐했죠. 10년은 고아를 위해서 살고, 다음 10년은 나환자를 위한 봉사를 하고 그 다음 10년은 농민을 위한 봉사를 하겠다고. 30년은 봉사하고 살겠다고요. 봉사는 하되 시설은 소유하지 않겠다고 원칙도 정하고요.
1957년부터 진해에 이효재 교수(전 이화여대교수)어머님이 하는 고아원(희망원)에 있었어요. 거기에서 일하면서 client(아이) 중심으로 모든 일을 하고, 아이들이 있으니 내가 있고 시설이 있다는 마음으로 일했어요. 거기서 집사람도 만났어요.”

-부인이 고아였다는 얘긴가요

“제 처가 12살 때 부모님과 할머니 동생들이 다 죽고 집사람과 남동생 하나만 살아서 희망원에 오게 됐대요. 12살짜리 여자 아이가 그 시신들을 다 수습해서 동생과 함께 논에 묻는 처참한 경험을 했어요. 똑똑하니까 희망원 원장님이 공부를 시켰고 영어를 잘해서 통역도 했어요. 그러다 결핵에 걸려 마산요양소에서 치료받은 후 미국유학 준비를 하다가 결혼말이 오갔어요. 그전까지는 서로를 결혼상대자로 생각지 않았죠. 저희 집에서는 당시 아버님이 진해시장도 지냈고, 집사람이 고아란 것 때문에 반대를 했죠. 결혼하기로 맘먹은 후에 아내에게 보낸 편지가 100통이 넘어요. 어려서 가족을 잃고 죽음을 경험한 아내는 제게 딸과 같다고 할까요.”

아버지는…. 장애인의 아버지

-자식도 낳지 않기로 약속하셨다죠

“아내가 몸이 약해요. 39kg밖에 안 나갔어요. 정작 더 중요한 이유는 시설을 운영할거니까 자식을 낳지 말자는 거였어요. 시설에 있는 아이들에게 소홀해지니까. 그러다 36살 때 아들을 낳았어요. 그 아들이 윤종신(가수)이구요. 자식이 둘이지만 우리 애들은 명절 개념이 없어요, 아버지는 명절날조차도 시설에서 일하니까 자기들의 아버지가 아니고 장애인의 아버지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원망 많이 들으셨겠네요.

“종신이가 가수 데뷔 후 잡지에서 ‘내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은 아버지’라고 인터뷰를 했어요. 원망대신 존경을 받다니 고맙고 감사하죠. 음악에 소질이 있는 줄도 몰랐고 중학교 때 기타 사달라고 해서 기타 사준 게 다였어요. 공부도 곧잘 해서 연세대 국문과에 들어가서 스스로 음악활동을 시작했구요.”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이 고스란히 아들을 움직인 거군요.

“사회사업을 하는 사람은 마이너스로 살아야 되요. 덩치를 키우면 안 되고, 바보같이 일해야 해요. 또 자원봉사자도 대접을 바라면 안 되요. 한사랑마을에 왔던 봉사자들에게도 ‘봉사하려면 봉사해야지, 접대하지 않는다’라고 자원봉사자 정신교육을 시켰고요. 제 연봉도 2600만원으로 오히려 직원보다 적었어요. 차 한 잔의 대접을 바란다든가, 득을 바라기보다는 손해를 본다는 생각으로 원장과 봉사자가 한마음으로 일했어요.”

윤광석 선생은 17년을 고아원에서 일하고 1974년 서울로 올라온다. 그때부터 장애인 시설인 다니엘학교에서 총무로 일한다. 1984년부터 전국장애인시설협회 사무국장으로 있으며 일본의 장애인시설을 둘러볼 기회를 갖게 된다. 1988년에 경기도 광주에 한사랑마을의 초대원장으로 10년간 일하다 정년퇴직을 했다. 퇴직 후엔 제천에 있는 장애인시설에서 6년간을 일한다. 30년간 봉사하며 살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은 50년을 넘겨버렸다. 시설의 장은 했지만 한 번도 시설을 소유해 본적이 없다. 그의 삶의 철학은 ‘바보처럼 살자’이다. 모든 모임에서 앞자리 서는 건 불편하단다. 뒤처리하는 자리가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때로는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기사인 줄 오해한다.

-장애인복지에서 자연스레 노인복지로 관심이 넓어졌는데, 어르신사랑연구모임(어사연)은 어떤 모임인가요?

“2000년 겨울 시작해서 회원이 3,000명이 넘고 저도 그 회원이고요. 매달 한 번씩 어사연공부방모임을 가집니다. 지난 9월에 100회 기념세미나에서 축사를 했어요. ‘복지를 하는 사람들은 소명의식을 갖고 일해야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싫증을 느끼지 않게 된다’라는 내용이었어요. 복지관련 분야의 종사자들의 소명의식과 지속성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내 나이 77세가 되고 또 아내가 병으로 고생하다보니까 자연스레 노년의 삶과 질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어요. 또 언젠가 닥칠 죽음도 준비해야 되고요.”

-나이가 들면 자칫 활동이 적어져서 세상 돌아가는 물정에 어둡거나 거리감이 생깁니다. 이 때 제일 필요한 게 뭔가요

“육체적으로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움직여야죠. 정서적으로 각종 여가 생활을 해야 되고, 또 소통을 위해서는 컴퓨터를 활용할 줄 알아야 해요. 내 친구들은 아무도 컴퓨터를 할 줄 몰라요. 컴퓨터를 하면 영역이 굉장히 넓어지죠. ‘금빛사랑 은빛향기’라는 인터넷카페를 운영하는데 정보도 얻고 여행도 가며 교류를 하죠.”

-잘 지낸 일생은 죽음준비를 잘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데 선생님이 생각하는 죽음은 어떤 건가요

“죽음은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과정이죠.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어 몇 배로 확장돼서 크고 무한한 공간으로 날아가니까 마다할 일이 없죠. 두려워 할 일도 없고요. 자식들에게 신앙을 심어주었으니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구요. 또 악착같이 돈 벌겠다고 아등바등하지 않고 빚지지 않았으니 다행이구요.”

-베푸는 삶에 이미 익숙해서인지 죽음에 대한 담담함을 느낄 수 있네요. 오히려 지상에서 영원으로 날아가는 날개를 갖게 된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베풀다니요? 받은 게 많아요. 1986년에 미국에 가니까 예전에 고아원에 있던 6명이 태권도 사범이 되어 있었어요. 그들이 존경하는 선생으로 기억해줘서 고마웠어요. 갈 때 1,000불을 갖고 갖는데 올 때는 그들이 낸 후원금으로 10,000불이 되어있더군요. 집도 없이 지내니까 동생이 집을 마련해줬고, 아들이 생활비 대줘서 받기만 했죠.
그래도 아직 줄 게 있으면 주어야죠, 아내가 당뇨에다가 치매까지 와서 고생하니까 제 노후는 가정복지를 하나 더 할 수 있어 다행이죠. 오늘도 며느리를 오게 해서 아내를 돌보게 했어요. 어서 집에 들어가야죠.

<삶과 사랑과 죽음> 2009년 11, 12월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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