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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에 죽음이 있다.  2010년 5,6월호에서

 

진교훈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생명윤리학
홍양희 회장과 진교훈 교수님의 대담올봄은 4월 하순이 되도록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그래도 계절의 변화는 이기지 못하는지 벚꽃축제라도 열린 듯 화사한 서울대학교 캠퍼스에서 진교훈 명예교수님을 만났다.

자리에 마주하자 교수님은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으로 이주해오던 시절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나누어주셨다. 해방과 6.25전쟁을 겪으시고 학생들과 함께 우리나라 민주화 역사의 한가운데를 지나오신 진교훈 교수님의 말씀 중에서 누구보다 뜨거운 인간애와 생명 존중사상을 느낄 수 있었다.

홍양희: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시면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진교훈: 나는 철이 들 때부터 해방, 사선을 넘어 월남, 6.25전쟁, 서울수복 등을 겪으며 수많은 참혹한 죽음을 직접 목격하면서 죽음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삶 속에 죽음이 있다’고 믿습니다. 가장 확실한 것은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인데,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삶과 죽음을 연속선상에서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자로서 하나님이 이 땅에서 숨을 거두는 것이 죽음이라고 할 때 죽음은 영생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고요. 죽음이 끝이라면 참혹하게 죽은 사람들이 너무 허망한 것이 아닐까요?

나는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도 울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로 가셨는데 왜 웁니까? 어머니께서 내가 책을 읽다가 우는 것을 보시고 남자가 눈물이 흔하다고 하신 뒤로 울지 않았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나의 죽음관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겠지요.

“생사는 하나님 소관이지 인간의 일이 아닙니다”

홍양희: 최근 우리사회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선종, 세브란스병원 김옥경 할머니의 무의미한 연명치료중단과 관련하여 존엄한 죽음, 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중단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점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세요.

진교훈: 원론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하여 신경외과 전문의가 아닌 사람이 의학적인 결정을 내리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죽음은 의학, 종교, 철학, 예술적 분야까지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죽음은 이 세상 삶의 종결이므로 많은 사람이 공동으로 결론을 내야 하는 것이지요.

또한 어떤 이유든지 의도적으로, 고의로 인간의 삶을 단축시켜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생사는 하나님 소관이지 인간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치료가 무의미하다고 의사가 판단했을 때, 완전뇌사, 불가역성이라고 판단했을 시에는 그것을 존중해야 합니다. 즉, 심폐소생술 등 연명 처치를 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뇌사자로부터 장기이식을 할 때 장기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연명 처치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 역시 인위적으로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 여겨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단, 뇌사자라고 판정되었다 하더라도 건강한 사람처럼 환자에게도 영양과 수분은 공급해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생명이 단축되어서는 안 되니까요.

통증이 너무 심해서 환자가 “차라리 죽게 해주세요” 라고 할 때 이것은 쉽지 않은 결정일 것이지만 의사조력자살은 죄악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고통도 무의미하다고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교자, 의사, 열사들은 가장 모범적인 사람들이지만 고통스러운 죽음을 죽었는데 이것을 단순히 인간적인 고집만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안 주실 것 같습니다. 즉 고통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담당의사, 전문의, 종교인으로 구성된
‘생명윤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지혜를 모아야”

홍양희: 현재 국회에서 존엄사법안을 심의하고 있습니다. 법 제정의 필요성과 생명윤리를 전공하시는 학자로써 이 법에 담아야 할 중심사상을 말씀해주십시오.

진교훈: 우선 ‘존엄사’라는 용어는 순교자, 열사, 의사 등 의로운 죽음에 대해서 쓸 수 있는 말이지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존엄사가 아닙니다. ‘연명치료 중단법’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이 법안의 내용이 문제인데, 악용될 우려가 있어 보입니다. 말기환자의 경우 사회, 경제적인 이유로 가족이 숨을 거두게 하거나 병원에서도 대기자가 많아서 졸속 처리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담당의사, 전문의, 종교인으로 구성된 ‘생명윤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종교인이 욕심 없이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의사 개인의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럼으로써 가족의 의심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위원이 직접 참석하지 못할 경우에는 전화, 화상회의 등의 방법을 빌어서라도 번잡을 최소화하면 될 것입니다.

일본의 경우 15명의 위원 중에 12명이 비의료인입니다. 죽음은 종합적으로 봐야 하기 때문에 각 분야의 지혜를 모아 결정해야 합니다.

“학교교육에서 죽음학을 가르쳐야 합니다”

홍양희: 우리 국민의 정서, 예를 들면 孝사상, 체면중시의 의료집착적인 태도, 죽음금기, 죽음거부적인 문화를 긍정적인 변화로 이끌기 위한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진교훈: 부모의 임종시에 그동안 불효한 것을 회복하려고, 한을 풀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효사상이며 자기위안은 될지 몰라도 효는 아닙니다. 체면 중시, 의료집착적인 태도도 비정상적인 강박관념이므로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죽음을 금기로 삼는 것(죽음 거부문화)은 고쳐야 합니다. 서양은 그리스도 교회 건물이 지하무덤에서 시작되었으며, 교회가 바로 무덤이고 무덤 가운데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화장장을 만들거나 영안실만 확장하려고 해도 혐오시설 취급을 하며 동네 주민들이 반대합니다. 심지어 교통전문병원도 꼭 필요한 것인데도 주민들의 반대로 지어지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긍정적으로 바꾸려면 적극적인 죽음교육을 해야 합니다. 특히 학교교육에서 죽음학을 가르쳐서 죽음이 허망하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조부모, 부모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접하도록 임종시에 인사를 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삶 속에 죽음이 들어와야 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돈에 대한 욕심도 덜할 것이고 무리한 짓도 덜할 것입니다. 나는 꼭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천재지변과 가난 때문에 장수가 대단한 일이었고, 장수인의 경험이 중요하여 노인존중사상도 컸을 것입니다. 사람에 대해 그와 같은 계량적인 사고를 갖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홍양희: 우리나라에는 1963년 강릉 갈바리병원에서 마리아의 작은자매회 수녀들에 의해 호스피스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호스피스 이용 환자는 전체 말기암환자의 10%도 안 됩니다. 왜 그럴까요.

진교훈: 호스피스 이용환자가 10%도 안 되는 것은 시설도 부족하지만 정부가 호스피스를 많이 이용하도록 조치를 하지 않는 데도 원인이 있습니다. 완화의료학(통증클리닉)을 공부하는 학생도 많지 않고 기존의 병원의 비용문제도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말을 꺼려하기 때문에 호스피스의 좋은 점에 대해 교육을 하기가 힘들고 따라서 호스피스에 대한 인식도 별로 되어있지 않지요. 학교의 죽음학 과정에도 호스피스에 대한 교육을 포함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홍양희: 좋은 죽음은 평안한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좋은 죽음을 말씀해주십시오.

진교훈: 좋은 죽음은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소를 지으며 임종하는 것입니다. 가족, 가까운 친척들과 이승에서의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용서하고 용서 받음으로써 죽는 사람도 남은 사람도 정신적 부담을 줄일 수 있어요.

억울하거나 살해당하거나 어린이가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 등은 좋은 죽음이라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이 선택하신 방법이니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노인들의 죽음준비는 가족들이 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영정, 수의를 준비하고, 여유가 있으면 묘자리도 준비합니다. 개인적으로 나장(裸裝), 화장, 수목장, 수장 등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단, 무엇이 되었든 후손과 사회에 누가 되거나 부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관혼상제가 가계에 미치는 영향이 큰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인색해서도 안 되지만 낭비는 죄악입니다. 장례문화도 검소하게 해야 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삶은 순례이고 이승의 삶은 정거장입니다.

나는 사전의료지시서를 써놓았어요. 장기이식과 같이 남의 장기를 이식받아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거부하며 마취도 원칙적으로 반대합니다. 아들딸에게 줄 유품도 처리했어요. 입던 옷은 세탁해서 어려운 곳에 줘야지 태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책도 대부분 도서관에 나눠주었습니다.

홍양희: 삶과 죽음, 무의미한 생명연장에 관한 교수님의 통찰을 저희와 나누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죽음을 터부시하기보다는 삶의 자연스러운 연장선상에서 보는 문화가 하루빨리 확산되기를 바랍니다

<삶과 사람과 죽음> 2010년 5,6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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