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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료의향서 – 중앙일보

 

“제가 80이 다 돼 갑니다. 나중에 의식 없이 오래 (병원에) 누워 있으면 뭐하겠나 싶어서요.”

지난달 28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의대 종합관 3층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 임시 사무실. 전남 나주의 70대 할머니가 전화를 했다. 할머니는 “우리 집 양반(남편) 돌아가실 때 보니까 너무 힘들어 보여서, 건강하게 맛있는 거 먹다가 그 지경(임종 직전) 되면 얼른 떠나는 게 맞지 않나 싶다”며 의향서에 대해 물었다.

할머니와 상담을 하던 각당복지재단의 웰다잉 강사 장경희(49·여)씨가 “사전의료의향서는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을 때 인공호흡기를 달지 않고 강제 영양공급을 받지 않겠다고 서약하는 제도입니다”라고 취지를 설명한다. 할머니는 서명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서류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또 벨이 울렸다. 서울에 사는 최모(80) 할머니는 “마지막에 죽을 때 입원해서 뭐 많이 꽂고 있고 그런 거 안 하고 싶다”며 “자식들이 미국에 있는데 거기서는 다 한다(사전의료의향서를 쓴다는 뜻)고 하더라”고 말했다. 오전 10시부터 한 시간 반 동안 스무 통 넘는 전화가 왔다. 이 사무실에는 하루에 적게는 40통, 많게는 80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하루 평균 50명이 사전의료의향서에 서명하고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고 서약한다.

2009년 연세대 의대 세브란스병원 김 할머니 존엄사 사건 이후 연명치료 중단을 선택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김 할머니 사건은 대법원이 처음으로 가족들의 연명치료 중단 요청을 받아들인 사례다. 2010년 12월부터 지금까지 사전의료의향서에 6500명이 서명했다.

박길준(75) 전 연세대 교수도 아내(72)와 같이 사전의료의향서에 서명했다. 박 전 교수는 “사전의료의향서가 없으면 중환자실에서 연명 줄 열 개, 스무 개 달고 있어도 누가 그 줄을 뗄 수 있겠느냐”며 “김 할머니 같은 상황에 빠지게 되면 고생하지 않고 인간답게 끝내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박 전 교수는 “본인이야 의식을 잃으면 그만이지만 연명치료가 이어지면 가족들도 한 달 이상 못 버틴다. 긴 병에 효자가 없지 않느냐”고 덧붙였다. 그는 의향서를 자식들에게 맡겨 망설이지 못하게 못을 박아뒀다.

치료비를 아끼려 연명치료 중단을 결정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 공동대표인 홍양희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 회장은 “70대 노인이 가장 많고 서울 강남·분당 등 비교적 부유한 지역 주민이 다수”라며 “치료비를 아끼려고 서명한 경우는 별로 없다”고 말했다.

폐암을 앓다 숨진 최모(61·여·서울 동작구)씨가 그런 경우다. 최씨는 평소 “위급한 상황이 오면 연명치료, 그거는 하지 말자. 무의식 상태에서 고통이 더 심할 거 아니냐”고 남편(66·아파트 경비)과 얘기를 해 왔다. 그녀는 사전의료의향서에 서명하고 지난해 7월 숨졌다. 남편은 “생활에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연명치료 중단을 결정할 때 치료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 존엄사 사건 이후 의료 현장에서도 사전의료의향서 제도를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 이전에는 세브란스병원 등 한두 곳만 사전의향서를 사용했으나 김 할머니 사건 이후 17곳으로 늘었다. 서울대·세브란스·서울아산·삼성서울·강북삼성·경희대·이대목동·중앙대 병원 등이다. 본지가 지난달 28~30일 전국 44개 대형 대학병원(상급종합병원)을 조사한 결과다. 한양대·전남대·순천향대 등 대다수 병원들도 심폐소생술만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활용하고 있다.

건강한 사람은 자발적으로 연명치료 중단을 선택하는 반면 의료 현장에서는 그러지 못한다. 환자에게 처음부터 그런 얘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아서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은 사전의향서를 도입했지만 거의 활용하지 않고 있다. 해당 병원 관계자는 “환자에게 연명치료 중단 얘기를 꺼내면 ‘열심히 치료해서 낫게 해줄 생각은 하지 않고 죽음 얘기를 하느냐’고 반발해 제도 활용이 미미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임종 한 달여 전이 돼서야 의료진이 환자 가족을 설득한다. 의료진의 정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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